최초의 워해머 40k 소설을 찾아서 Warhammer 40k


 워해머의 소설을 전담하여 출판하는 자회사 블랙 라이브러리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물론 워해머는 존재해왔고, 워해머 소설도 많지는 않지만 존재해왔습니다. 오늘 소개할 Deathwing은 워해머 40k 역사상 최초로 책의 형식으로 출판된 소설입니다. 그 전에도 화이트 드워프를 통해 단편 소설이 종종 연재되긴 했으나, 이 책을 시작으로 GW는 워해머 40k의 소설 사업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이 무렵 같이 출시된 이안 왓슨의 인퀴지터와 함께>

 30년 전의 소설이다보니 지금과는 표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부터 사뭇 다릅니다. 거기에 지금 소설과 달리 일러스트도 무척 많습니다. 어릴 적 2판 룰북에서 페이지가 떨어질 때 까지 보던 여러 일러스트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은 표지만이 아니라구요. 내용도 지금의 워해머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뭐 배경을 넘어 과연 소설 자체로 짜임새가 괜찮은가? 라고 한다면 글쎄요. 전체적인 평점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고 그 중에 해당 소설의 리뷰를 찾아보다 엄청 웃긴 한줄평을 보게 되어 잠깐 옮겨보자면..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냄새가 우리 집에 진동해서 견딜 수가 없어 도서관에 기증했다.>

 도서관에 냄새 풍기면서 이웃들한테 끼치는 폐는 생각하지 않고.. 뭐, 좀 웃기는 부분도 있긴 한데 저는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튼 지금의 워해머 40k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을 감안하면,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세계관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현재의 워해머와 비슷한 점도 많아요. 7개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단편집인데, 일단 4개까지 읽어본 현 시점에서 느낀 점을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어렵사리 구한 상태 준수한 1990년 초판입니다. 
최초의 소설이니 최초의 플라스틱 차량 키트였던 초판 라이노 옆에 둬봤어요.>

  첫 번째 단편인 데스윙은 다크 엔젤의 1중대 엘리트 터미네이터 데스윙의 기원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의 다크 엔젤은 지금과는 정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후드로 대변되는 비밀스러움이 상징인 현재의 다크 엔젤과는 달리 이 때의 다크 엔젤은 미국 인디언 컨셉의 자연주의적 컨셉이 두드러진 챕터라고 볼 수 있겠네요. 2판 룰북의 일러스트와 당시의 캡틴 모델을 보면 이런 특징을 엿볼 수 있지요.

<컨셉이 나쁘진 않지만 이럴거면 굳이 왜 이름에 “다크”가 들어가는지?>

 신병 모집도 과거 북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과 비슷한 문명을 영위하는 행성에서 전사들을 뽑아갑니다. 터미네이터 30명으로 구성된 주인공 파티는 오랜만에 임무차 고향 행성에 들렀다가 부족들이 모두 살해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금속의 도시를 발견하게 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행성은 진스틸러의 오염으로 도시에서 진스틸러 패트리아크를 황제로 모시도록 강요당하고 착취되고 있었던 것. 이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터미네이터들이 명예롭게 희생당하고 결국 행성을 진스틸러의 감염으로부터 탈환해냅니다. 데스윙은 이들이 타고 온 스톰버드 건쉽의 콜사인인데, 희생된 이들을 기념하고자 데스윙의 색으로 갑옷의 페인트를 남겨두기로 한다는 것이 대강의 내용.

 현재의 마린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우선 마린들은 나이를 먹어요. 인간보다는 오래 살지만, 의외로 그렇게 오래 살진 않습니다. 캡틴이 200살 정도인데, 스스로의 고령을 생각하며 나는 이제 곧 죽게 되고 여기에 다시 오지 못하겠구나 하며 생각하는 장면도 있고.. 그런데 드레드넛에 들어가면 여기서 좀 해방되는 듯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불구가 된 영웅이 안치되는 드레드넛이 아니라, 한 드넛이 위 캡틴에게 야 너 나이 먹어서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드넛에 안들어올래? 이런 투로 얘기하는 장면이 있는 것을 보면.. 불구가 아니더라도 상당한 위업을 달성하면 드레드넛에 들어갈 기회(저주..)가 주어지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수록된 일러스트는 다크 엔젤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챕터) 블러드 엔젤.>

 그리고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을 모를지니- 로 대변되는 공포 앞에서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점이 현재의 스페이스 마린들인데, 여기서는 겁을 집어먹는 장면들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수술을 받고 강화된 인간이라는 점은 같고, 물론 정예병답게 일반 병사보다야 용감하지만 현재와 같이 다른 차원의 초인까지는 아닌 듯. 하지만 역시 공통점이 더 많지요. 호루스 헤러시의 이야기가 중간중간 나오는데 대충 지금 소설에 나와도 맞는 얘기고, 그 외 진스틸러의 생태나 특징들은 전부 현재와 같습니다. 의외로 그럭저럭 읽을만했어요. 작가가 고트렉이라는 캐릭터를 거의 만들어내다시피 한 윌리엄 킹이라 잘 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두 번째 이야기는 뒤틀린(Warped-워프의 라고도 해석될 수 있으니 중의적) 별이라는 이야기인데, 선천적으로 매우 뛰어난 싸이킥 자질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게 마수를 뻗히는 카오스의 세력과 이를 수호하여 자신의 후계자격으로 삼으려는 인퀴지터와 그 재량 하의 스페이스 마린간의 다툼 이야기입니다.

 둘이 싸우는건 후반부에나 나오고 초중반은 주인공 아이의 일상과 카오스와의 접촉이 주로 내용을 이룹니다. 도살장에서 일하는 이 아이는 싸이킥에 눈을 뜨게 되면서 도살장의 돼지 같은 여주인이 기회만 되면 자기를 강간하려 하는 마음을 알게 되어 식겁하면서도, 그 여주인의 아름다운 딸을 벗겨서 섹스하는 망상에 빠져있습니다. 이 과정이 조금 웃기기도 한데 카오스는 목소리로 아이에게 접촉하고 아이로 하여금 원을 상상하게 만들어 본인이 현실계에 나올수 있는 통로를 만드려 하는데, 자꾸 야한 생각만 하니 카오스의 존재가 심히 빡치면서 집중하라고 다그치는 장면 등 현재의 블랙 라이브러리 소설에서 볼 수 없는 개그와 에로티시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로티시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80년대의 영국은 오히려 지금보다 성에 대한 검열이 훨씬 느슨한 시기였고, 섹스에 대한 모든 것을 거의 원천적으로 차단하다시피 하는 지금의 GW와 달리 아래와 같이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이 드러나는 일러스트들이 즐비했습니다. 소설에서 이런 묘사가 드러나는 것도 당시의 시대 분위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우리의 세계는 과연 진보하고 있는 것인가..

<GW의 과거 행보>

 에로티시즘이 더 강화된 것은 이 다음 단편인 라크라이마타인데, 로그 트레이더의 함선에서 일하는 네비게이터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행성에서 금지된 쾌락을 야기하는 향수를 취급하게 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향수를 계기로 장님(이지만 늘 그렇듯 일반인보다 더 잘 보는)이자 미인 애스트로패스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조금 너무 가까워진 주인공은 황제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사명인 애스트로패스답지 않게 그녀가 품은 불만을 알게 되고 불안해하는데.. 

 뭔가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네비게이터나 애스트로패스 등의 개념이 이미 이 때 확정되어 있다는 점이 꽤 놀라웠고 워해머 세계관에서 뭔가 이런 류의 감정선을 보는 것도 신선했습니다. 결말도 애스트로패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폭력 없는 비극이니, 현재의 블라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감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읽은 마지막 이야기는 외계의 짐승을 품고(Alien Beast Within) 라는 칼리두스 어쌔신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여자 어쌔신은 칼리두스 템플의 최고 요원입니다. 연령을 불문하고 완전하게 변신하는 데에 능한 그녀는 심지어 아름다운 엘다로 변장하여 모두를 속이고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 있어 천재적입니다.

<Jonas Spokas님의 칼리두스 어쌔신 일러스트>

 그런데 어느 날 상관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이후 그녀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놓게 됩니다. 그 임무인즉 바로 진스틸러 하이브리드로 변신하여 침투, 컬트를 와해시키라는 것. 그러나 이번에는 시술의 특성상 진스틸러 하이브리드로 변신 후에 절대 다른 형태의 변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될 것이라고 하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달받는 주인공.

 어쌔신답게 스스로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냉철하게 임무를 수행해왔던 주인공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이를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시술대에 오르고 몸을 재구성한 후에 컬트로 침투하게 되지만..

 이 당시 메인 악역은 진스틸러 컬트였던걸까요? 냉전을 거쳐 내부의 적에 대한 경계가 극도로 심하던 80년대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인지, 진스틸러 컬트에 대한 묘사와 공포심은 여기저기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 단편의 어쌔신 말란디는 데스윙과 같이 출판된 최초의 40k 장편소설 인퀴지터에서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궁금하네요. 

 본서는 블랙 라이브러리에서도 흑역사로 취급되는 모양인지 블랙 라이브러리가 출범 후 표지를 바꾸고 재출간된 적도 있지만 아주 많은 부분들을 통째로 삭제, 통편집당한 후에 재출판됐다고 합니다. 현재와 설정이 다소 다른 부분이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연한 것이니 굳이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싶긴 한데.. 그 외에 분위기 쪽에도 손을 많이 댄 듯 하나 이쪽도 야설급으로 아주 노골적으로 음란한 묘사에 치중한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재밌게 묘사된 것을 보면 개정판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인터넷에서 구매가 가능한 유일한 초판본은 아마존답게 아주 양심 없는 가격에 올라와 있습니다.
평점 1점에 주목.>

 수집가인 제 입장에서는 기왕 구하는 것, 최초의 40k 소설이라는 의의에 걸맞게 1991년 2쇄도 안돼, 무조건 1990년의 초판을 구하자! 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수고로움이 들었단 책이기도 합니다. 아마존에 있는 중고 셀러에게 전부 연락을 돌려가며 발매일자와 상태를 상세히 물었지만 1990년판이 아니거나, 책의 물리적인 상태가 도저히 소장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훼손된 수준이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했으니까요. 물론 30년이나 된 책이니 그럴 법 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요원했던 1990>

 이 책에 그만한 수고를 들일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건 솔직히 영 잘 모르겠으나, 저는 읽는 동안 꽤 재밌는 경험이긴 했습니다. 사실 저의 이 책 사냥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초판이라도 이 책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판됐는데, 양자의 사이즈와 책등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저는 영국판을 선호하는데 아마존에서 파는 위 상품이나, 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미국판이니 언젠가! 영국판을 반드시 손에 넣도록..

<그럼 다음에는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더 야하다고 소문난 최초의 40k 장편 소설, 인퀴지터를 읽어보겠습니다.>


덧글

  • 무명병사 2020/11/24 21:12 # 답글

    저 설정이 각색된 게 바로 "금의환향한 데스윙 분대가 죽음을 각오하고 진스틸러를 쓸어버린 걸 기리기 위해서 데스윙 터미네이터 아머를 흰색으로 정했다"는 거겠네요..
  • 아슈라 2020/11/25 20:28 #

    아하, 그 설정의 적도 진스틸러였군요. 의외로 근본에 충실한 설정이네요. 근데 왜 다크가 뼈색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 무명병사 2020/11/25 21:39 #

    제가 듣기로는 그 데스윙들이 "여기(우리 고향)에 우리 뼈를 묻는다!" 하는 각오로 터미네이터 아머를 흰색으로 칠하고 결사항전을 벌였다더군요.
  • 자유로운 2020/11/25 01:26 # 답글

    의외로 안 짤리고 남아있는 설정들이 많군요.
  • 아슈라 2020/11/25 20:29 #

    잘 보면 거의 대부분 유지되고 오히려 잘린 설정이 더 적은 듯 합니다.
  • Lapis 2020/11/25 10:35 # 답글

    GW도 초반에는 삽질을 많이 했었고, 나름 흑역사라 생각했는지 이후엔 칼질을 조금 많이 당한 바로 그 책이군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선 새것과 마찬가지인 책을 구하기 쉽지 않은 고전인데 고생하셨겠습니다.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슈라 2020/11/25 20:30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90년의 지땁이 이랬다면, 그 이전의 80년대 워해머 판타지를 다룬 소설은 대체 어떤 지경(..)이었을지 심히 궁금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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