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해머 세계관의 소설을 출판하는 GW의 자회사 블랙 라이브러리의 책들은 대부분 처음에 하드커버(혹은 간혹 한정판 버전) 출시→ (약 반 년~1년 후) 페이퍼백 출시 → (몇 달~ 몇 년 후) 절판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대개 최초 출판일로부터 빠르면 1년, 길어도 4년 내에 대부분의 책들은 절판 크리를 맞는 것 같습니다. 워해머가 현지에서 인기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SF/판타지는 여전히 마이너한 장르고, 그 안에서 워해머는 스타워즈 등 메이저 프랜차이즈에 비하면 더욱 마이너한 영역이다보니, 호루스 헤러시나 계속 표지가 바뀌며 재판되는 고트렉&필릭스 등의 일부 베스트셀러를 제외하면 몇 년간 재고를 유지할만큼 판매량이 나오진 않는 모양입니다.
물론 절판된 책들도 언제든 이북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만, 저처럼 실물 종이를 선호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짧은 책들의 수명은 아쉽습니다. 나중에 읽고 싶은 책이 생겨도 손에 넣을 수가 없게 되어버리니.. 결국 GW의 한정판 모델처럼 블랙 라이브러리 소설들도 기간을 놓치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저 역시도 지금 당장 읽지 못해도 나중에 읽어야지 하면서 하나 둘 모아둔 소설이 벌써 꽤 쌓여, 점검해보니 읽지 않은 책이 전체 블랙 라이브러리 소설의 1/3을 넘어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최근 조금 여유가 생겨 그간 밀린 책들을 하나씩 넘겨보고 있습니다. 편식이 심해서 정사의 큰 흐름을 따라가는 소설보다 제가 미니어처 게임에서 플레이하는 팩션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소설간 완성도 편차가 큰 편이긴 하지만, 역시 뽕맛에 보는 블랙 라이브러리 소설이고, 페이퍼백은 요즘 국내 대형서점에서 꽤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기 때문인지 돈 아깝단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물론 시간이 아까웠던 적은 ... 꽤 있습니다.)
<저는 30k보다 40k를 훨씬 좋아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요즘은 제 40k 메인 챕터인 블러드 엔젤 소설들을 보고 있는데. (10년 전에 봤던 불쏘시개 레이픈 소설들 말고, 지금 설정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들로) 정리 및 정보 공유도 할 겸 하나씩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표지 빼고 모든 것이 완벽한, 아주 모범적인 블랙 라이브러리 소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Devastation of Baal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표지.. 넘나 구려요..>
이 소설은 가이 해일리의 비공식적인 단테 3부작(Dante- Devastation of Baal- Darkness in the Blood)의 중간 권에 해당하는 책으로, 이야기의 큰 흐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바알 성계를 노리는 티라니드 레비아탄 함대에 맞서 블러드 엔젤은 후계 챕터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군단 시절 이후 유례가 없던 대병력으로 티라니드에 대항한다는 심플(?)한 줄거리입니다. 책의 후반에 워해머 40k의 최근 스토리라인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대균열이 일어나고, 프라이머리스 마린이 블러드 엔젤과 그 후계 챕터에 흡수되는 내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워해머 40k 메인 플롯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블러드 엔젤 소설이기도 합니다.
제가 표지 빼고 완벽하다고 말했던 이유는, 방금 말한 것처럼 메인 스토리와 큰 관련이 있으면서도, 각 캐릭터의 심리나 성격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블랙 라이브러리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각 장면의 묘사가 아주 멋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소설 내용은 워낙 유명해서 알 분들은 다 알고 있을테니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보겠습니다. 혹시나 읽으실 분들은 이하 스포일 주의입니다!
우선 지금까지 플레시 테어러를 제외하고 설정만 존재했던 여러 후계 챕터들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블러드 엔젤보다 유전병에 더 강한 챕터도, 약한 챕터도 있고, 그런 특성들이 챕터 구성원들에게 녹아들어가 성격을 형성하는 부분도 블러드 엔젤 팬에게는 꽤나 재밌게 다가옵니다. 쾌활한 기사와 그의 시종을 연상시키며 시종일관 블러드 엔젤 계열답지 않은 유쾌함을 보여주다 챕터 전체가 장렬하게 희생한 Angels Excelsis 챕터도 재밌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역시 피의 기사Knights of Blood 챕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블러드 엔젤 변절자 중 가장 유명한 챕터>
이들은 검은 분노와 붉은 갈증에 미쳐서 피아 불문 너무 잔인한 모습을 보인고로 제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변절자Renegade 낙인이 찍혔고, 심지어 코른이 아닐까 의심된다는 식의 설정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여기서 보게 되니 꽤 반가웠습니다. 이 불청객들이 그래도 자기 부계 챕터 돕겠다고 등장했을 때 단테가 불쾌하며,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를 시전했는데, 그 자리에서 나름 멋진 연설을 통해 단테를 설득시켜 같이 싸우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익히 알려진대로 민간인들을 죽이고 피를 빠는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며 역시 미친 놈들이구만 싶었으나, 마지막은 또 여느 피의 챕터보다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설정 한 줄만 달랑 있던 챕터를 작가가 정말 입체적으로 잘 살렸구나 싶습니다.
외로운 릭터의 잠입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친구의 외로운 여정과 쓸쓸한 잠입공작이 없었다면 티라니드는 대균열 유무와 무관하게 블러드 엔젤에게 패했을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친구가 성당요새원에 틈을 내기 전까지는 블러드 엔젤는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고, 적당한 희생을 감수하면 현실적으로 하이브 함대를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계산됐으니까요. 물론 릭터가 깎아낸 그 구멍이 생긴 이후에는 요새수도원이 아주 정신없이 털리게 됩니다.
하이브 마인드의 사고방식과 스스로의 존재를 말 그대로 사람의 깎아서 버리는 손/발톱처럼 무가치하게 여기고 행동하는 개체들의 모습들도 잘 표현됐습니다. 후반부 스웜로드와 단테의 일기토는 스피디하고 멋있긴 했지만, 설정상 하이브 마인드의 현신과도 같은 스웜로드가 매번 나올때마다 결국 쥐어 터지는 전투력 측정기처럼 취급되는 것 같아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집니다. 가사상태의 단테가 생귀니우스와 대화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비슷한 장면을 다른 소설에서 먼저 봐버렸기 때문인지 조금 반복되는 느낌이네요.
<제 전투력은 53만입니다.>
메피스톤과 카반다의 만남은 솔직히 왜 들어갔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소설의 몇 안되는 단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카반다를 위시한 코른의 세력까지 넘어오면 답이 없기 때문에 미리 퇴치하려고 했고, 부분적으로 성공해서 바알이 아닌 바알의 위성으로 카반다가 떨어지게 됐다는 부분은 알겠는데, 굳이 전개상 필요한 부분이었나 싶습니다. 물론 카반다는 생귀니우스 시절부터 블러드 엔젤의 원수와도 같은 블러드써스터긴 한데, 하이브 플리트와의 싸움이 주제인 소설에서 굳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실제로도 위성에 떨어져서 티라니드랑 깔짝대며 싸우긴 하는데, 바알 본토의 싸움과는 완전히 무관한지라 실제 전황에 큰 영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면을 강제로 채워야 했던걸까요. 메피스톤 등장씬에서 건질만한 장면은 다른 소설에서도 자주 보이는 메피스톤의 초사이어인화. 여기서도 날아가는 썬더호크 해치에서 뛰어내려 비행하다 에네르기파를 써서 썬더호크 비행 경로를 막아버릴 정도로 까맣게 군집한 티라니드 비행 개체의 무리를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반면, 길리만과 처음 만나는 단테의 모습은 정말 훌륭하게 묘사됐습니다. 페이지 너머 길리만의 위엄과 인간성이 독자에게까지 전해지는 느낌이라고 하면 조금 과장이려나요, 실제로 제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느꼈을법한 경외의 감정을 아주 실감나게 전달해줍니다.
<너무 장수해도 고통스럽다는 단테옹>
그리고 생존 중인 스페이스 마린 중 최고령이라는 단테의 장수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아주 절절하게 드러냅니다. 스웜 로드와의 일기토 후 단테는 심장에 칼이 박혀서 임사체험을 하는데, 생귀니우스와 대화를 합니다. 이 때 단테는 프라이마크에게 자신의 긴 세월 동안 받았던 책임의 무게와 고통에 대해 구구절절 토로하며 죽음이라는 휴식을 진심으로 간절하게 갈구합니다. 이 장면뿐만 아니라 소설 곳곳에서 단테가 고령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러번 묘사합니다. 본인은 이제 정말 좀 쉬고 싶지만, 챕터가, 나아가 제국이 금빛 영웅으로의 자신을 너무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기에 단테는 아주 사적인 자리를 제외하면 헬멧을 절대 벗지 않습니다. 늙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이 낙담할까 두렵기 때문이지요. 언제나 영웅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 떄문에 괴로워하는 단테옹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GW에서 작가에게 반드시 쓰라고 요구를 한 부분이 아닐까 하는데, 대놓고 "프라이머리스 마린들이 우리의 미래다" 식의 묘사.. 아니 그냥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 구마린들은 곧 퇴장하고 이제 프마린들의 시대가 올거야. 라는 식으로 단테와 메피스톤을 위시한 챕터 지휘부들끼리 이야기합니다. 물론 세스는 프마린이 우리의 구원이 될거라는 단테에게, 프마린은 구원이 아니라 우리를 대체할거라고 정신 좀 차리라는 투로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블러드 엔젤계의 챕터들이 공유하는 유전병이야말로 우리의 축복인 동시에 책임이며, 우리의 정체성인데, 이를 공유하지 않는 프마린은 절대 우리가 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등장한다면 어떨까?>
이 부분은 최근 설정과 좀 배치되는 부분인데, 작년 말에 나온 싸이킥 어웨이크닝에서 공식적으로 프라이머리스 데스 컴퍼니가 나오면서 프마린도 유전병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물론 시기상 바알에 온 이후에 생겼다고도 볼 수 있지만, 블러드 엔젤 프마린들이 워프에서 약 70년간 인도미투스 성전을 치르는 동안 한 번도 유전병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냥 또 생각 없이 결함 없는 새로운 세대의 초인 병사! 식의 설정으로 만들었다가, 밋밋하다는 비판이 많자 그냥 나중에 슬그머니 뒤집은 것처럼 생각되는군요.
대충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추려봤습니다. 결국 책의 사건들은 블러드 엔젤에게는 비극입니다. 블러드 엔젤 챕터는 레비아탄의 침공으로 이름난 지휘관 대부분이 사망하고, 한 번도 파괴된 적이 없었던 챕터의 본진인 Arx Angelicum이 반파되었으며, 기함을 포함한 함대 대부분이 파괴, 성계 주민 대다수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챕터의 근위대인 생귀너리 가드 또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전사했고, 70%가 넘는 챕터 소속 스페이스 마린이 사망했습니다. 특히 제1중대장 칼라엔과 아스토라스의 지휘 하에 분견대가 카디아를 지원하러 파견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바알에 남아 있던 블러드 엔젤은 사실상 거의 전멸입니다.
단 이 내용들이 전부 소설에 나온 내용이긴 한데, 이상하게 국내 웹에서는 위 내용까지만 알려져있고 바로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의 내용들은 덜 알려진 것 같아 첨언하자면, 마지막 10 페이지 정도에서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벌충이 됩니다. 70%가 넘는 구성원이 사망했지만 길리만이 데려온 프마린으로 블러드 엔젤 뿐만 아니라 후계 챕터 모두가 다시 완편 챕터 수준까지 보충이 됩니다. 생귀너리 가드도 한 명만이 살아남았지만, 그 가드를 익절티드로 승진시키고 곧 생귀너리 가드 인원을 선발한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바알로 추락한 기함도 길리만이 고쳐주고, 성당요새원도 재정비해서 새로 재건합니다. 결국 소설이 끝날 즈음에는 다시 멀쩡한 챕터가 되는 것을 보면 카울에몽을 위시한 제국의 복원기술력이 대단하다고 보아야 할지, 조금 작위적이라고 해야 할지..
여튼 지금까지 여러 블러드 엔젤 소설을 읽었지만, 거의 가장 만족스러운 소설이었습니다. 내용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카반다 부분과, 프마린이 우리의 미래다 어쩌구 이거요. 전 구마린을 좋아합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좀 하자라고 느끼는 것은 표지! 표지가 너무 싼티나고 내용이랑 맞지도 않는 느낌입니다. 표지 주인공은 그래서 누구인가요? 묘사에 딱 맞는 인물도 없고, 분위기도 그닥 어울리지도 않고, 구도도 무슨 80년대 히어로 같고, 사실 제가 이렇게 잘 쓴 소설을 이제야 읽은 것도 이 표지 영향이 큽니다. 다시 봐도 전혀 사고 싶지 않게 생겼잖아요?
<차라리 이게 표지였다면! 싶지만 칼라엔은 이 당시 바알에 없었으므로 기각..>
그럼 오늘 독후감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블랙 라이브러리 게시글에서는 메피스톤 일대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글
그렇다고 해도 결국 터질 건 터져서 최근에는 하나 둘 나왔다 이렇게 보는게 좋지 않나 싶더군요. 손을 본건 아니고 안정화 시킨게 고작이니까요.
설정상 비약적으로 유전병 발병률을 낮춰준거라면 병종을 따로 만들 정도로 인원이 모이기도 힘들 것인만큼, 유닛이 아니라 차라리 옛날 론울프처럼 단독 캐릭터로 내줬다면 조금 납득이 갔을 듯 합니다.
모델상으로도 그나마 남은 블러드 엔젤 구마린을 상징하는 모델 중 하나인 데컴마저 프마린이 가져가는걸 보니 정말 지땁이 구마린 절단내려는 것 같아 안타깝고, 다음은 생귀너리 가드인가 싶기도 하고.. 내 밀봉 생귀너리 가드 두 박스 어쩌지 싶은 마음도 들고.. 이래저래 착잡합니다 ㅠ
본문에서 제가 언급한 단테와의 언쟁도 그 장면만 두고 보면 세스의 논리를 단테가 제대로 반박하지 못합니다. 의외의 지력캐 세스..
어느순간 안보고 방치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