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해머40k 플레이어라면, 특히 블러드엔젤과 티라니드의 애호가들이라면 올해 9월 출시된 스페이스 헐크에 관심없었다 하실 순 없으실 겁니다. 초고퀄리티의 한정판이라는 명목으로 전세계 게이머들의 구매욕을 잔뜩 고취시키는데 성공한 GW. 저 역시 한여름밤의 꿈에서 진스틸러들과 싸웠어야 했으니, 이때만큼 GW가 미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반 년 이상 고시공부로 무림강호를 떠난 제게 오크타운의 배려 덕분에 비교적 쉬운 방법으로 스페이스 헐크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시촌에서 혼자 게임을 할 수는 없었으나 동봉된 책들은 눈만 있다면 읽을 수 있는 법, 거기에 블러드엔젤이니 굳이 게임을 안해도 배가 부릅니다. 기쁜 마음으로 스페이스 헐크의 새로운 룰들과 설정들을 보면서 이것저것 뒤적이던 제 주목을 얻은 것이 있었으니,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이번 스페이스 헐크에 원정 간 라이브러리언의 이름은 칼리스타리우스Calistarius 형제.
2. 이번 스페이스 헐크 원정은 두번째. 600여년 전의 첫번째 원정에서 블러드엔젤 챕터 전원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무려 950명이 사망했다는 것.
두번째야 그렇다 치더라도 첫번째가 잘 납득이 안가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칼리스타리우스 형제는 현재 블러드엔젤의 수석 라이브러리언이자 별칭 죽음의 군주라고 불리우는 악명 높은 메피스톤Mephiston의 과거 이름입니다. 메피스톤이 지금같은 무시무시한 힘과 새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아마겟돈 제2차 전쟁의 사건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무너진 빌딩에 고립된 칼리스타리우스 형제는 '붉은 갈증'1)에 시달리다 결국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힘을 얻고 메피스톤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혈천사들이여, 붉은 갈증만 넘기면 횽처럼 S5, T5 된다
즉, 스페이스 헐크에 참전한 라이브러리안 칼리스타리우스는 곧 메피스톤의 청년(?)시절의 모습으로, 2차 스페이스 헐크 원정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것입니다!2) 오오! 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재밌게 되었습니다. 물론 GW에서 "스페이스 헐크의 칼리스타리우스는 메피스톤의 과거 모습입니다"란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중 혹시 동명이인의 스페이스마린을 보신 적 있으신 분 계신가요? 그것도 같은 챕터에 같은 사서관 소속의? 확률상 거의 불가능하죠, 년도상으로도 살펴볼 때 모순이 없습니다. GW측은 명백히 대놓고 메피스톤의 과거를 전제로 하고 디자인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고..) 이 소식이 퍼진 후 해외 포럼에서도 그럴줄 알았다느니, 어쩐지 서전트 로렌조 칼이 지금 메피스토칼이랑 똑같이 생겼다느니 등등 말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저는 전~혀 의도치 않게 메피스톤 모델을 두가지 버전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청년 메피스톤은 터미네이터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문제는 두번째 사항으로 1차 원정에서 거진 챕터 전체가 날아간 사건입니다. 스페이스 헐크 설정집에 의하면, 1차 스페이스 헐크 원정을 지휘한 사령관의 이름은 상갈로Commander Sangallo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블러드엔젤 코덱스에 의하면 현재 챕터마스터인 단테Commander Dante는 899.M40, 즉 1차 스페이스 헐크 원정 전에 챕터마스터로 임명됩니다. 그 후에 일어난 1차 스페이스 헐크 원정은 말씀드린 것처럼 전 챕터가 출전하여 950명이 목숨을 잃은 챕터의 역사에 남을만한 사건인데, 이렇게 전 챕터가 출전하는 전쟁을 단테가 지휘하지 않는다면 대체 단테는 언제 싸우는겁니까? 일부는 단테는 당시 여전히 챕터마스터였고, 상갈로는 1st 컴퍼니의 캡틴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Captain Sangallo라면 또 모를까, 호칭 역시 둘 다 똑같이 Commander인 것으로 보면 그럴 확률은 희박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원정 당시에는 엄연히 챕터마스터로 블러드엔젤의 최정점에서 군림하고 있어야 할 단테는 새로 등장한 스페이스 헐크 설정에 의하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899.M403)
단테가 챕터마스터로 임명
996.M40 1차 스페이스 헐크 원정:
전체 챕터 중 950명의 블러드엔젤이 전사
646.M41 2차 스페이스 헐크 원정:
칼리스타리우스 형제가 스페이스 헐크에 참전
941.M41 2차 아마겟돈 전쟁:
블러드엔젤 챕터 전체가 아마겟돈 전쟁에 참가
칼리스타리우스 형제가 하데스Hades Hive에서 붉은 갈증을 이겨내고 메피스톤을 참칭
문제점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거진 챕터 전체가 사망했다는 것 역시 납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비슷하게 챕터가 거의 날아간 사례로 플레시 테어러라든가, 크림슨 피스트를 들 수 있는데, 크림슨 피스트 역시 한때 잘나가던 유명 세컨드파운딩 스페이스마린 챕터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크가 날린 미사일 한방에 본사 요새수도원을 날려먹고, 모성인 린계Rynn's World가 거의 결단날뻔한 싸움 끝에 간신히 승리하지만, 고작 100명 정도만이 생존하며 거의 멸종에 가까운 지경에 놓입니다. 챕터마스터 칸토Kantor의 적극적인 재활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건 이후로 수백년이 지난 지금 아직 챕터의 절반도 채 회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블러드엔젤은 어떤가요? 더 암울하다고 할 수 있는 950명의 전사, 황폐한 모성과 고질적인 질병 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금새 전력을 회복합니다. 아무리 우월한 블러드엔젤이라고 해도 이들의 모병과정을 보면4) 한번에 뽑을 수 있는 인원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세컨드파운딩 챕터로부터 조금씩 마린들을 징발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으나 이내 그 모순점을 발견합니다.
작년에 출간된 블러드엔젤의 소설 Red Fury를 보면 다음과 같이 바알의 블러드엔젤 요새수도원 전경이 묘사됩니다. "고요한 회랑과 울리지 않는 연병장, 대체 형제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블러드엔젤 세컨드파운딩 챕터마스터의 질문입니다.
문제의 소설
이는 블러드엔젤이 거의 내전으로 챕터 절반 이상을 말아먹은 후 그 부족분을 세컨드파운딩 챕터들로부터 충원받을 것을 '통보'(요청이 아닙니다)하기 위해 그들의 챕터마스터들을 소환할 당시 광경입니다. 당연히 모집된 세컨드파운딩 챕터마스터들은 성격에 따라 분개한다든가, 놀란다든가, 어쩔 수 없다든가 등의 반응을 보입니다만, 단 한명도 "전에도 이런 적이 있잖은가?"란 뉘앙스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례 없는 일이다! 이런 오만이라니 블러드엔젤은 생귀니우스의 적자 자격이 없다. 차라리 블러드엔젤을 바알에서 끌어내리자!"란 반응은 있었지만요. 이 소설의 배경 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메피스톤이 분명히 등장합니다. 따라서 2차 아마겟돈 전쟁 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1차 스페이스 헐크 원정으로부터 최소 1,000년은 뒤의 사건들입니다. 1차 스페이스 헐크 후에 세컨드 파운딩 챕터의 협조를 얻은 적이 없다는 것은 이로써 명확해지죠.
그렇다면 세컨드파운딩 챕터들로부터 징발한 것도 아니고, 별달리 클론을 만들어낼 기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 블러드엔젤은 어떻게 그 세력을 이토록 빨리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설명이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설정의 구멍이 존재합니다. 아마 스페이스 헐크 신판 설정을 담당한 Gav Thorpe는 블러드엔젤을 크림슨피스트처럼 악조건에서도 일어나는 불굴의 전사들로 묘사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년도 하나를 잘못 표기한 끝에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을 자세히 묘사하는데 일조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좋다고 쪼개고 있는 이 사람이 문제에요 문제
이와 같은 설정간의 충돌은 GW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워해머와 비슷하게 수많은 소설과 기타 매체로 세계관을 늘려가는 스타워즈의 경우 조지 루카스라는 거물이 중심을 잡고,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구도라는 단순한 흐름을 따라 잔가지들을 쳐내려가며 설정을 정리하기에 상대적으로 설정의 충돌이 적은 편(이번 클론워즈는 제외합시다)이지만, 워해머는 조금 상황이 다릅니다. 수많은 종족들간의 전쟁과 수없이 개정되고 추가되는 코덱스, 소설 등의 설정을 한명이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감수작업을 거치고 설정 전담분야에 대한 지원을 해 준다면, 위와 같이 눈에 띄는 오류들은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고, 현실적으로 설정오류들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사실 게이밍이 주가 되는 워해머의 특성상 반드시 수정해야할 중대한 문제라고도 생각치 않구요.
이런 문제들은 설정과 게이밍이 충돌하는 영역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가령 스페이스마린에 대한 소설 묘사들을 보면 파워아머를 입은 상태에서는 3m의 신장에 이르며, 파워아머에서 발생되는 일정한 전력은 옆에 있는 제국 장교의 눈을 따갑게 만들 정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당백이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요. 거의 죽지도 않고, 일반 제국 보병은 전장에서 스페이스마린의 등장을 마치 수호천사의 강림처럼 여깁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
하지만 테이블 위에서는 어떤가요? 일단 스페이스마린의 모델을 좀 보세요. 설정대로라면 터미네이터 베이스를 쓸 정도의 부피에 적어도 T5, W2는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키부터 벌써 가드맨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가드맨이 갑옷입으면 그냥 딱 마린같이 될 것 같아요. 가드맨 다섯과 마린 한명이 싸운다면 어떻게 될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괴리를 두고 설정이랑 안맞는다며 한탄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마린을 터미네이터 베이스 위에 세우고 T5, W2를 주면 당연히 포인트가 올라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린의 수가 줄어들 것이며, 따라서 수가 줄어든 만큼 당연히 팔리는 모델의 숫자도 줄어들것이기에! 그렇게 될 일은 GW가 망하는 날에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설정에 접근하는 일부 소수 게이머들의 태도입니다. 이와 구멍도 많고, 현실과 괴리도 있는, 즉 허술하다면 턱없이 허술하다고 할 수 있는 설정들을 마치 성전처럼 여기고, 설정에 큰 관심 없는 게이머들을 낮게 본다거나,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양 설정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게이밍에 치중한다고 해서 설정을 열심히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돈 없어서 모델 못 사는 놈들이라든가, 설덕후 등으로 매도하시면 안됩니다. 일전에 제가 포스팅한 것처럼 워해머는 게이밍, 모델링, 설정의 세가지가 적절한 조화를 이룬 게임입니다. 어느 쪽에 관심을 갖든 그것은 온전히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며, 한 가지를 잘한다고 해서 그 분야에 능하지 못한 다른 유저들을 경시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설정은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게임하는 것도 그것만으로 충분히 즐겁습니다. 두개를 같이하면 더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야가 완벽하게 겹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집합도 있고, 여집합도 있습니다. 각 분야에 존재하는 그 한계를 인지할 수 있는 유저가 현명한 유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해도 서로 존중할 줄 아는 자세는 꼭 필요합니다. 모두 똑같이 워해머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한글판 룰북과 코덱스가 출시되는 그날까지 상호협동해서 더 좋은 여건을 만들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註
1) 블러드엔젤의 고질병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번역한 Index Astartes 5 포스팅(http://blackasura.egloos.com/2484244)을 참조해주세요.
2) 미션의 마지막에 칼리스타리우스가 자신을 수송하러 온 드랍십을 통한 무선에서 "다른 형제들은 오는 과정에서 다 쓰러졌다" 이런 식의 말을 합니다. 고로 유일한 생존자라는거겠죠.
3) 워해머 40k 세계의 역법입니다. M40이란 서기 4만년대를 뜻하고 그 앞의 수는 백년단위입니다. 즉 위의 숫자는 40899년이란 거겠죠. 사실 M40이 세기 개념처럼 가장 큰 단위를 빼는 것인지 조금 헷갈리긴 합니다. 정확히 아시는 분은 훈계해주세요.
4) 블러드엔젤의 엄격한 신병모집절차는 Index Astartes 2 포스팅(http://blackasura.egloos.com/2482569)을 참조해주세요.